내가 사람들에게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있다. '착하게 생겼네', '똑똑하게 생겼네'. 둘 다 나의 콤플렉스를 가장 정곡으로 찌르는 말들이다. 나는 착하지만 비겁하고, 똑똑하기에는 자격이 없다.

 착하다는 건 타자와의 관계가 수동적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타자는 다른 사람을 지칭할 뿐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는 모든 존재다. 사람일 수도 있고, 구조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타인이 느끼는 나의 성격은 내가 아니라 페르소나인 데 있다. 착하다는 것은 내가 가진 진짜 생각이 어떻든지 간에, 내가 아나키스트이거나 파시스트이거나, 내가 오타쿠인 것이나 아니거나 하는 것에 상관없이 나는 사회가 용인하는 스테레오타입적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착하다는 건 비겁하다는 뜻이다. 무색무취하고 진부한 삶과 생각을 하게 만든 사회구조를 저주하면서도 정작 망치를 들고 구조를 깨부수러 가지는 못하는 착한 비겁자. 그리곤 결국 이 삶의 양식이 골수까지 미쳐 나도 모르게 '일반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강신주의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팽이는 각자 돌아야 한다. 현재를 살자. 그래 좋지. 가슴으로는 받아들이는데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한다. 그리곤 이내 바쁘게 돌아가는 바깥 세상에 몸을 맡겨버린다. 그게 바로 나다. 비겁하다. 그래서 착하다는 말을 들을때 부끄럽다.

 어떤 사람을 똑똑하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똑똑한 사람에게 자문을 구하지 멍청이의 의견을 묻지는 않는다. 그런데 권위를 가지려면 고유성을 지녀야 한다. 그 사람이 가진 가치가 동네 개라도 알 만한 가치라면 그 가치가 권위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나는 멍청이에 불과하다. 고유성은 없고 모두 모조품 투성이다. 백과사전에서 발췌한 지식, 언제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 그것도 껍데기뿐이다. 멍청이인 나에게 똑똑하다고 하는 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똑똑함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잔뜩 두른 지적 허영의 두루마리들이 나를 더 껍데기뿐인 사람으로 만드니까.

 나답게 살아야 한다. 나쁜 사람으로, 진정으로 똑똑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런데 아직 방법을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스테레오타입적 삶에서 벗어날지,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는다. 몸은 미성숙해도 머리는 성숙한 사람이고 싶은데, 지금은 몸도 마음도 모두 미숙하기 짝이 없다.